영화든 드라마든 아무 생각 없이 즐기자는 차원에서 보면 큰 무리가 없는 한 줄거리를 즐기게 된다. 얼마나 멋진 장면이 많은지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이 많은지 웃음과 눈물의 적절한 섞음, 플롯에서 긴장과 완화의 절묘한 조화, 설득력 있는 극의 전개에서 저도 몰래 극에 빠져들게 된다. 그게 극의 특성이다. 하지만 스토리 구성, 플롯 배치, 묘사의 디테일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가면 감상은 사라지고 분석에 따른 작품의 완성도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사실 완성도 높은 드라마는 그렇게 많지 않다. 대부분 디테일에서 점수가 많이 깎인다. KBS드라마 스페셜 <렉카>도 디테일에서 상당한 점수를 잃었다. 이 드라마는 멜로가 아니다. 감동을 목적으로 제작된 게 아니라 특정 사건을 목격한 한 시민의 추격을 카메라가 쫓아 가는 형식을 빌려 경찰과 사회 현상을 비판한 작품으로 봐도 무방하겠다.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극의 전개는 스릴을 가미했지만 담담하다. 전혀 울컥하는 감동을 고려하지 않았다.
전체 스토리를 기준으로 평가하면 극의 전개를 위해 필요한 장면들을 적절히 배치했다. 사장의 꾸중, 도로에 미끄럼 조작, 승용차 트렁크 시체로 보이는 물체 목격, 승용차 운전자와 실랑이, 다른 차량 견인 위해 출동 레커 간의 경쟁, 뒤늦게 자존심 발동, 승용차 추격, 블랙박스 SD카드 도난, 경찰 신고와 외면 과정 경찰과 승강이, 독자 추적, 다른 레커 기사들의 협조, 용의자 검거와 증거 증발로 의기소침, 실직위기, 정비소에서 혈흔 발견(정비사 도움), 다시 추격, 셀프주유소 현장 확인, 유괴되던 여성 구조와 용의자와 재격돌, 차량 재 추격 레커로 제압, 복직.
이하 사진 이미지와 상관 없이 드라마가 지닌 문제점들을 짚어본다.
1. 주인공의 성격은 입체적인가?
드라마는 레커 회사 사장의 꾸중에서 출발한다. 하루에 10건 출동 경인 실적이 있어야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치열한 경쟁 구도에 내몰린 레커업계의 현실을 보여준다. 다리까지 저는 주인공 태구는 그다지 실적이 좋지 않다. 공정한 경쟁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착한 녀석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튼 주인공은 착하다. 그렇다고 실적 추달에 내몰렸기로서니 도로에 기름을 뿌려 사고를 유도한다? 이 장면은 주인공이 전혀 고민하는 흔적도 없이 진행된다. 아주 담담하게. 뭐 필요하면 언제든 그럴 수 있다는 듯이 능숙한 움직임으로. 이걸 어떻게 봐야 하나? 주인공 착한 놈 맞아? 그리고 그렇게 소극적이던 착한놈이 검은 승용차 나쁜놈에게서 받은 돈과 가래침 때문에 빡 돌아서 목숨 걸고 대드는 건 설득력 있는 설정인가 싶기도 하고.
이건 마치 영화 <라이터를 켜라>에서 김승우를 보는 듯한 기시감이 든다. <라이터>에서 김승우는 차승원이 불 좀 빌리자 해서 빌려준 라이터를 돌려주지 않자 목숨 걸고 깡패두목 차승원을 쫓아가 300원 짜리 라이터를 돌려받는 끈질김의 위대한 승리를 보여줬다.
<렉카>의 태구도 그런 인물 유형이란 얘긴가? 그렇다면 심리의 전환이 제대로 명분을 얻어야 하는데, 태구는 어정쩡하다. 자존심인가 정의로움의 발로인지 구분이 어렵다. 트렁크 속 여성을 구해야겠다는 의지는 과거 동생을 구하지 못한 기억의 소환으로 근거를 삼았는데,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람인지조차도 확실하지 않은 트렁크 속 물체가 자기 동생과 동일 선상에 올릴 만한 연결고리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주인공이 정의에 불타는 사자가 되었다? 그리고 자존심. 병신이라는 치욕스러운 말과 가래침까지 받아가면서도 그닥 분노를 보이지 않다가 뒤늦게 자존심 상해 도저히 그냥 두고 못보겠다는 복수심이 발동한 거라면 조금 이해는 하겠다만, 종종 동생의 불행, 자신의 죄책감이 계속 오버랩되는 건 뭘 어쩌자는 건지. 복합적 원인으로 퉁치고 볼 수도 있겠지만 드라마가 그런 애매한 스탠스를 취하는 순간 설득의 약발은 상쇄되고 만다.
2. 명확하지 않는 발단
드라마 전체 줄거리를 기준으로 보면 태구가 검은승용차 나쁜놈을 신고하고 추격하는 이유는 자기 동생의 죽음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주 설득력 떨어지는 설정이긴 하지만 여튼 드라마 흐름 상 어쩔 수 없는 장면 배치일 것이다. 어쩌면 작가가 여기기에 몇몇 괜찮은 장면들을 요소요소에 배치해놓고 그 장면들을 이어나가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 붙이는 방식으로 작업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억지 설정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도 하지 않았나 싶다.
쓰다 보니 이제라도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것이 작품 이해에 도움 되겠다.
"어릴 때 당한 사고로 다리를 절게 된 태구는 사설 렉카 기사로 살아간다. 그러나 법을 지켜가며 실적을 올리기는 어려웠고, 사장으로부터 해고될 수 도 있다는 경고를 받는다. 하는 수 없이 태구는 어느 날 밤 고의로 사고를 일으키고, 거기에 걸려든 검은색 차의 트렁크에서 어떤 여자애가 실려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나 검은차는 오히려 태구를 협박하며 현장을 빠져나간다. 미심적은 마음에 검은차를 추적하게 된 태구는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사건에 말려들게 되는데..."
이건 KBS가 소개한 줄거리다.
기획의도는 밥벌이의 무게. 각자의 무게 앞에 각자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누군가는 피해를 주고 누군가는 욕을 먹으며 그 무게를 버텨간다. 그럼에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그럼에도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 이라고 적혀있다.
정태구 (cast.이태선)
사설 렉카 기사.
어릴 적 사고로 다친 다리 때문에 일자리 찾기 어렵자, 친구 정삼을 통해 렉카 일을 구했다.
하지만 역주행도 겁나고, 사고도 무섭다. 참고 일하고 있지만, 성과 없어 잘리기 직전이다.
사장의 협박에 내몰려 이 갈고 나선 날.
하필 그날에 본 장면 하나 때문에, 사건에 휘말리기 시작하는데.
조정삼 (cast.강기둥)
사설 렉카 기사. 태구의 친구.
자신과 같은 고아 출신 태구를 가족처럼 챙긴다.
하지만 일 느리고, 오지랖 넓은 태구 때문에 혼자 동동거리기 일쑤인데.
태구가 어떻게든 잘리지 않고 일해서 다리 수술받을 수 있기를 고대한다.
안경장-안경엽 (cast.조희봉)
태구와 정삼의 학교 선배이자 동네 경찰.
사건이 귀찮고, 일에 휘말리긴 더 싫다. 어떻게든 편안하게 매일의 근무를 마치고 싶지만 그게 쉽나.
오늘도 후배란 놈이 끌고 온 사건에 밤 근무 내내 시끄럽게 생겼다.
검은차-김도훈 (cast.장률)
검은 차를 타고 다니는 의문의 남자. 대기업 3세의 수행 비서.
양아치-송현태 (cast.유수빈)
검은차의 사주를 받아 일하는 클럽 MD출신 매니저. -출처 KBS 홈페이지
3. 엉성한 디테일
시간. 검은차의(앞서 나쁜놈으로 표현했는데 방송국에서 그를 '검은차'라고 표현했으니 따른다) 동선에 따른 시간의 총량과 태구의 동선에 따른 시간의 총량에 너무 큰 차이가 난다. 태구가 동분서주하는 사이 그 시간동안 검은차는 동네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거냐? 기껏해야 저수지로 가려다 되돌아 왔고 셀프주유소에서 기름 넣은 게 모두다. 그 시간에 태구는 경찰도 찾아가고, 양아치를 쫓아가 싸우기도 하고 레커 회사 사무실에 들러 도로 CCTV를 확인, 저수지로까지 운행, 다시 주유소까지 돌아다니는 그 바쁜 와중에도 그게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 모르지만, 검은차 들이받은 이유로 방송에까지 보도되는 것을 보는 아~주 긴 시간을 획득하고 있었으니. 뭐 검은차는 '나잡아봐~라'하며 슬로비디오로 움직이고 있었던겨?
회상. 드라마가 사건을 쫓아가는 중요한 동기로 주인공의 과거를 중심에 앉혀놓고 있다. 툭하는 기억을 소환하는 것이 방증이다. 그런데 이 장면이 너무 어색하다. 위에위에 있는 사진을 참고하면 되겠다. 어린 주인공이 자신만 빠져나온 상황에서 동생을 구하지 못한 절절한 후회가 트렁크 속 무엇일지 모를, 말하자면 주인공 혹은 작가가 자기 편한대로 선입견을 가져버린대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버린 결과로 이어진다. 태구가 목격한 것은 딱 두 가지. 트렁크 속 붉은 색이 묻어 있는 물체와 검은차주 나쁜놈의 소매에 묻은 붉은 얼룩. 작가와 주인공은 이것을 유기된 젊은 여성과 피라고 단정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렇게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 근거가 아주 부족함에도. 여기에다 어린 주인공 남매의 절박한 상황에서 왜 둘은 움직이지 않고 손만 뻗었냐는 것이다. 무릎을 다쳤지만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먼저 탈출했으니. 그때는 또 차에 불도 붇기 전이었다. 왜 들어가서 안전벨트를 풀고 꺼내지 않았는가? 주인공의 우유부단한 성격을 묘사하기 위해서? 그게 아니라면 이 장면은 절반으로 시간을 압축해 부지불식간에 손쓸 틈도 없이 자동차에 불이 붙고 동생이 희생되었어야 더욱 설득력이 갖춰진다.
주유소와 CCTV. 주유소 CCTV는 사건 해결의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 플롯이다. 아무 생각 없이 보면 그러려니 하고 중요한 한 장면으로 인정받고 스토리 전환의 중효한 포인트로 기록에 남겠지만, 기억을 되감기해보면 이보다 더 엉성한 장면은 없겠다 싶다. 태구는 사람도 없는 무인 셀프 주유소의 CCTV를 해킹 과정도 없이 신속하게 입수해 자기가 쫓는 차량의 위치를 파악한다. 이 장면도 그렇거니와 더 내가 작가라면 부끄러워서 머리도 못 들 설정은 왜 CCTV를 통해 기름넣고 가는 그 장면만 보았느냐는 점이다. 자, CCTV를 보는 장면을 천천히 돌려보자. 어렴풋한 목격에 의한 현재 동생 나이 또래의 젊은 여성 피해자가, 나중에 나중에 밝혀지지만 여기서 탈출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왜 여성이 탈출하는 장면을 보지 못했냐는 것이다. 왜 주유소에서 기름만 넣고 떠나는 장면만 보고 아직 병산지역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판단만 이끌어낸 것이냔 말이다. 기가 찰 노릇이다.
도로CCTV는 아무나 열람 복사할 수 있나? 레커 블랙박스 SD카드를 양아치가 몰래 훔치는 장면이 공용 CCTV에 찍혔다. 정식 신고하고 열람 절차를 받았는지 의문스럽긴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드라마 작가와 연출가의 사건 전개 우선주의에 느닷없이 주인공 핸드폰을 통해 경찰관에서 보여지는 장면 설정은 이거 대체 뭐야 싶은 합리적 의심을 낳게 한다. 경찰이 먼저 볼 수 있는 영상을 민간인이 먼저 입수해 경찰에게 빨리 수사하라고 들이민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다.
대체 병산은 어느 정도 규모의 마을인가? 유명 엔터테인먼트 회사 회장의 별장까지 있는 동네다. 이 동네에서 여성을 성 노리개로 약취해 제공하는 파렴치한 범행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다. 검은차의 동선을 보면 이 동네는 썩 크지 않다. 주인공의 동선만 봐도 여기저기 쫓아다니는 것을 보면 구석구석 무엇이 있는지 다 아는 조그만 동네다. 그럼에도 이 동네 양아치들을 경찰이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그동안 희생된 여성이 한둘 아닐 텐데 그 사건들은 지금까지 잘도 감춰졌단 말인가? 피해여성들 중 아무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설정이라면 너무 여성을 무시한 설정은 아닌가?
TV뉴스에 나와 인터뷰하는 사장. 범인을 검거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우고 거대한 사건을 해결한 주인공은 밥먹고 앉아 있고 사건 해결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다만 레커 불법부착물을 사진찍어 고발했다는 그 '나쁜놈의 새끼' 차를 추적하라는 말 한마디 한 공으로 뉴스의 주인공이 된 사장의 모습. 이렇게 설정해도 괜찮은 것인지? 누가 봐도 뻔한 사건에 전혀 상관없는 사장을 인터뷰한 방송기자는 대체 정신이 있는 거임 없는 거임?
이외에도 복선의 부재 등 드라마 요소 부분에도 지적할 부분이야 무수히 많지만, 이정도로 정리하고 주제 측면에서 짧게 고민해본다. 이 드라마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기획 의도에서 밝힌 것처럼 삶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도 우리가 꼭 지켜야 할 것은 지키며 살아야 한다 뭐 그런 주장? 사건이 잘 해결되었으니 망정이지 만약에 현실에서 드라마처럼 무모한 추격에 싸움, 정의를 빙자한 불법행위(CCTV부분)들을 해야한다는 말? 이 부분이 드라마가 말하고자 했던 주제의식의 한계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라는 거창한 주제보다는 차라리 소박하게 범죄현장을 목격한 한 시민의 심리와 행동 추적 쯤으로 표현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안방 드라마치고는 박진감있는 장면 연출과 빠른 스토리전개, 적절한 긴장감 제공 등 재미요소를 많이 품었다는 평가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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